급발진으로 의심되는 사고로 인해 고귀한 어린 생명이 스러진지 딱 1년이다. 지난해 12월 6일 강릉 도심에서 손자를 태운 SUV 차량이 지하 통로에 추락, 운전자인 60대 할머니는 중상을 입었고, 동승했던 손자 이도현(당시 12세)군은 숨졌다.

이후 할머니 A씨는 손자를 숨지게 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아왔다. 10개월의 수사 끝에 지난달 17일 A씨는 무혐의 판결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다.

과연 어떻게 해야 급발진 의심 사고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해결의 첫 단추는 급발진 의심 사고에 대한 입증 책임을 소비자가 아닌 자동차 제조사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급발진 의심 사고가 일어나면 소비자가 스스로 자동차 결함을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자동차에는 약 3만 개의 다양한 부품과 함께 반도체 등 전문화돼 있는 전자 부속품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비전문가인 운전자가 사고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국회에서는 여러 명의 의원이 '입증 책임을 자동차 제조사로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을 지난 3월부터 발의해 두고 있다. 특히 H의원은 영업비밀이라며 버티는 제조사에 대해 자료제출을 강제하는 '법원의 자료제출명령제도'를 도입하는 내용도 담았다. 급발진 사고가 발생하면 사고원인을 의무적으로 조사하게 하고, 손해 배상책임에 대한 입증책임도 소비자가 아닌 자동차 제조사에게 돌리는 것이 공통된 골자다.

그러나 이 법안은 현재 국회 정무위원회에 9개월째 계류 중이다. 정무위는 지난 6월 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열고 개정안을 심사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국회 보좌관 한 관계자는 "해당 법안이 통과되려면 최소 2~3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내년 5월 21대 국회가 끝나면 자동 폐기된다는 것이다. 22대 때 어느 의원이 법 개정안을 다시 발의할지는 미지수다. 한다 해도 개정안 반대 '로비스트'에 막혀 시간만 끌다 또 폐기되는 사태는 반복될 것이다. 대기업 로비에 넘어가지 않고 진정 서민의 편에서 일하는 국회의원이 22대에는 나타날지도 의문이다.  

알량한 로비에 넘어가는 국회의원을 믿을 수 없다면 매달릴 곳은 이제 난공불락의  대기업인 제조사뿐이다. 자동차 제조사는 급발진을 방지하고 차량출력을 제한할 수 있는 ‘킬 프로그램’을 장착할 수 있다. 또 언제든 열람 가능한 ‘브레이크 페달 블랙박스’와 같은 안전 장치도 장착할 수 있다. 실제로 해외 자동차 제조사인 일본의 토요타, 미국의 테슬라 등은 차량 스스로 비정상적 급가속을 감지해 속도를 줄이는 ‘가속제압장치’를 장착하고 있다. 토요타와 테슬라가  ‘가속제압장치’를 장착하고 있는 것은 언제든 급가속이 발생할 수 있다는 반증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대기업은 무엇 때문인지 이 부품의 장착을 외면하고 있다. 

대림대 자동차공학과 김필수 교수는 “급가속을 막아주는 ‘킬 프로그램’ 도입은 기술적으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며 “이 기술만 도입해도 급발진 피해를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급발진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더 이상 수많은 급발진 의심 사고로 겪어야 하는 슬픔과 피해를 방치해서는 안된다.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자인 A씨는 손자를 잃은 슬픔에다 손자를 잃게 한 장본인이라는 죄책감에 갇혀 있다. ‘나 때문이 아니라, 급발진 때문이었다’는 결론만 나와도 슬픔에 갇혀 있을지언정 죄책감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무기력 상태가 그를 더 괴롭히고 있다.

비단 A씨 뿐만이 아니다. 분명 운전과 조작을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상대방을 다치게 하거나 죽게 한 운전자는 모두 이 같은 무기력감에 짓눌려 있을 것이다. 이런 불상사와 억울함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후진국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세계 10위의 선진국 대한민국 땅에서는 이런 급발진 의심사고는 사라져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자동차 제조사는 ‘킬 프로그램’을 의무 장착하고, 입법부는 제조사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법적 편향성을 바로잡아 소비자와 제조사가 공평한 법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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