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이 보이지 않는 상자 안에 고양이 한 마리를 가둬두고 옆의 가이거 뮐러 계수기 안에 방사능 물질을 넣어 둔다. 반감기 동안 방사능 물질이 붕괴하면 ‘가이거 뮐러 계수기’에 검출되고 여기에서 전류가 발생해 기계장치가 작동된다. 이때 기계장치는 방사능 물질이 든 병을 깨뜨리게 된다. 따라서 고양이는 방사능에 중독돼 죽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 고양이의 상태는 어떨까. 이론대로 죽어 있을까, 아니면 살아있을까. 양자 물리학자의 입장에서는 죽어 있다는 입장과 살아있다는 입장을 각각 반반씩은 받아들일 수 있다. 뚜껑을 열어보지 않는 한 고양이는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 이야기다.


지난 주말 어렵사리 지인 둘과 함께 동네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한 사람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한 사람은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기업인이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코로나에 집중됐다. 대학에서는 주로 비대면 수업과 시험을, 기업에서는 재택근무 비중을 늘려가고 있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코로나라는 질병으로 인해 변해가는 사회의 씁쓸한 한 단면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시험의 경우 동일한 학생의 성적이 시험방법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나는 사례가 극소수 있다고 한다. 대면시험 때는 시원찮은 성적을 냈지만 비대면에서는 좋은 결과를 낸다는 것이다. 물론 어쩌다 한 번쯤은 그럴 수 있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반복되면 다른 평가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엄마찬스나 디지털찬스 등을 쓰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탓이다. 성실하게 공부한 다수의 학생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것도 부조리이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재택근무를 하나의 특혜라고 인식하는 직원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마치 감독이 없는 새로운 자유라도 얻은 듯 재택근무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 이들의 공통점은 재택근무 때와 출근근무 때의 업무처리 속도나 정확도, 처리량 등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난다는 것이라고 했다. 일부 직원은 업무 능률에 현저한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반면 집에서는 업무의 능률이 오르지 않으니 웬만하면 출근해서 일을 하겠다고 하는 직원들도 있다고 한다. 이들은 사무실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업무를 처리하는 동료들과의 상호작용이 일의 효율을 높여준다며 출근을 선호한다고 한다. 이런 직원들은 재택근무를 하든 출근을 하든 업무처리 능률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경영자 입장에서는 전자의 경우 업무에 태만하다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된다. 이런 행위는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기업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고 직업윤리에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경영자는 불성실한 직원에 대해서는 불가피하게 재택근무를 최소화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업의 수익 창출을 위한 최소한의 생산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직업윤리와 직장규칙 준수를 통해 조직의 정체성과 건전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고양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상자 밖에서 벌어지는 논쟁만으로는 고양이의 생사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학교나 회사의 일도 마찬가지다. 비대면 시험 성적이 좋은 학생이 커닝을 하는지, 아니면 정직하게 시험을 보는지 교수는 확실하게 모른다. 재택근무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경영자는 재택 직원의 업무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합리적인 선에서 의심만 할 뿐이다.


하지만 고양이의 생사와 학생의 부정행위 여부, 재택근무자의 불성실 여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피조물은 하나씩 있다. 누굴까. 그것은 고양이 자신, 학생 자신, 재택근무자 자신이다.


석학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코로나가 변화시키고 있는 것은 경제적 패러다임이 아니라 우리의 업무 습관, 사회적 관습, 여행 습관이다.” 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코로나는 우리에게 학사윤리, 직업윤리, 사회 관습, 일상 습관 등 다양한 분야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경제적인 문제에 우선해 인성과 윤리에 방점을 찍고 여기에 맞는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그의 지적이 무겁게 다가온다.

 

2020년 12월 18일

전병수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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