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나간 역사의 한 시점을 되돌아보면서 ‘만약 그때 이랬다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하는 질문을 한다. 사실 만이 역사이기는 하지만 굳이 가정법을 써가면서까지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단순한 흥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슈베르트가 전염병으로 요절하지 않았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돌팔이 의사 테일러에게 눈 수술을 맡기지 않았다면….


이건희 회장이 떠났다. 오늘 오전 서울 삼성병원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한남동 자택과 이태원 승지원,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을 돌아본 후 수원 선영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혁신에 혁신을 부르짖으며 한 시대를 이끈 거인은 그렇게 떠났다. 공수래공수거라더니 자연의 섭리는 부자와 빈자,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를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작용한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바빌로니아에서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그가 꽃피운 헬레니즘 문명은 수 세기동안 더 지속되며 찬란하게 빛을 발했을지도 모른다. 단기간에 로마제국에 문명의 주도권을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과 함께 그가 추구했던 학문, 문학, 예술, 철학에 대한 미래 비전도 사라졌다. 슈베르트와 바흐가 요절하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보다 많은 명곡을 남겼을 것이고 보다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을 것이다. 많은 후진도 양성됐을 것이다. 


삼성전자 회장을 지냈던 권오현은 ‘초격차’라는 책을 통해 리더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리더는 차별화된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최악의 리더는 미래를 망치는 리더”라고 했다. 그는 부연해서 이렇게 말한다. “성공한 사람은 생존과 성장 외에 기여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리더로서 성공한 사람은 생존의 단계를 넘어 맡겨진 조직이나 회사를 지속적으로 성장시키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길게 보는 사람,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 미래를 리드하는 사람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회장은 분명 좋은 리더다. 성장과 함께 ‘미래 리드’라는 리더의 사명을 다했던 리더였다. 


먼저 사업 성적을 보자. 1987년 회장 취임 이후 2018년까지 삼성의 자산을 10조4000억 원에서 878조3000억 원, 매출 9조9000억 원에서 386조6000억 원, 임직원 10만 명에서 52만 명으로, GDP 대비 그룹매출 8.13%에서 20.36%로 올려놨다. 


사회, 문화, 스포츠 등의 부문에도 눈을 돌렸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을 연상할 정도로 문화 예술 진흥에 힘을 썼다. IOC 위원을 하면서 평창동계올림픽을 유치했다. 레슬링협회장으로 재임했던 1982~1997년 동안 우리나라는 올림픽,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등에서 무려 40개의 금메달을 땄다.  


그는 초일류를 지향했다. 끝없이 변화와 도전을 요구하고 질 경영을 앞장 서 지휘했다. 난관 속에서도 복합화, 정보화, 국제화를 역설하며 미래에 대비했다. 그 결과 넘지 못할 산으로만 여겨졌던 전자업계의 세계 최고봉 소니와 노키아를 무력화시키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삼성을 글로벌 브랜드 가치 세계 5위 기업으로 올려놨다. 범인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삼성은 세계 1등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로, 대한민국은 세계 1등 제품을 만드는 나라로 위상이 달라졌다. 


만약 이 회장이 2014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지 않고 오늘까지 건강한 삶을 유지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어떤 리더십을 발휘했을까.


슈베르트나 바흐가 썼을 명곡 이상으로 많은 것을 바꾸고 남기지 않았을까. 타고난 직관과 훈련된 통찰력으로 10년 후, 100년 후를 준비하고 미래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가 심어 놓은 1등 정신으로 현재와 미래를 잇는 사다리도 든든하게 놨을 것이다. 무엇보다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외쳤던 그 기개로 기업가가 존중받는 풍토를 만들지 않았을까. 일등기업, 초일류기업을 일궈낸 기업인에 대한 기자만의 가정일지도 모른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20년 10월 28일
전병수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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