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적 의미의 사기는 ‘나쁜 꾀로 남을 속이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입만 열면 거짓말을 일삼는 국회의원들은 왜 사기죄로 처단하지 못할까. 특히 요즘 국회의원들은 얼굴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해댄다. 국민을 속이는 능력이 국회의원의 자격조건이나 되는 것처럼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리발을 내민다. 코앞에 증거를 들이대도 “음해세력의 공작”이라고 둘러댄다. 


36년간 일제의 식민지 오욕을 견뎌오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을 맞긴 했으나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 돼 있었다. 나라는 좌우 대립으로 분열돼 있었다. 김구 김규식 등 좌우합작파의 노력이 있었으나 5·10 총선거를 기점으로 나라는 쪼개졌다. 국가의 분단은 분명 무지렁이 백성이 택한 게 아니었다. 소위 배운 사람, 독립운동가, 권력의 상위층 인사들이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후로 호가호위 하면서 나라를 쪼갰다. 나라를 나눠먹으면서 그들이 얻은 것은 최상위 권좌였다.


북한 권좌에 김일성이 앉았고, 남쪽은 이승만이 차지했다. 남한은 반공을 국시(國是)로 정했고, 북한은 공산주의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가황 ‘훈아 형’이 일갈했듯이 백성의 안위를 위해 일한 군주는 없었다. 모두가 그들 일신상의 영욕을 채우기에 바빴다. 다행히도 남쪽에는 한때 박정희라는 지도자가 나타났다. 동서양의 비교행정학 학자들은 한국의 비약적인 발전에는 그 시대 그 상황에 걸맞은 리더십을 지닌 박정희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하고 있다.


나라든 가정이든 먹고 살만해지면 이제 민주화, 인권, 분배론이 고개를 든다. 분배론자들은 가난한 시절, 생활고를 견디며 허리띠를 졸라맸던 그 아버지, 그 통치자를 독재자로 모는 습성이 있다. 일찍이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공명은 고구려 침략을 위해 “동이족은 영리하고 결속력이 좋은데다 지형적으로 요새가 많아 무찌르기 힘드니 이간책을 써야 한다”는 계책을 냈다고 한다. 제갈량을 최고의 군사(軍師)로 만들려는지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미 좌우, 노론소론, 기득권 대 민주화, 친일 대 반일로 분열돼 있다. 우리가 분열한 것이 아니라 정치꾼들이 우리를 분열시켰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 오로지 최고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일념으로 반대파를 나쁜 프레임에 묶어버린다. 특히 지금 한국에서 좌파를 자칭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프레임 엮기에 능수능란한 기교를 지니고 있다. 모두가 빈한했던 시절, 그들은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스스로 시국사범이 되어 투옥을 자처했다. 그리고 훗날 투옥 경력을 훈장삼아 정치현장에 뛰어든다. 인생의 시나리오를 그렇게 그려놓고 살아온 ‘계획범’이기에 이들의 인식체계는 신앙처럼 굳건하다. 사실 민주화를 부르짖던 시절, 가난하고 소외받던 농부의 아들은 정작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다. 아들 뒷바라지로 밭 갈고 김매는 부모님 얼굴이 천장에 떠 있어 못했다. 뒷배가 든든한 부르주아의 아들들이 미래에 대한 투자로 ‘계획된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고, 이들이 오늘날 당여의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의 재산공개 내역이 어디 농부의 아들이나, 평범한 직장인의 그것과 같던가. 


그럼에도 민주화 투사 이미지를 한껏 부각하면서, 가난한 백성을 위한 분배정책을 펴겠다는 위장막을 치고 있다. 고도의 표 계산 속에, 상대를 모든 백성이 혐오하는 ‘토착왜구’의 프레임으로 몰아넣고, 가난한 사람 소외받은 사람 노동자를 위한다고 부르짖고 있다. 가난한 자를 위해 자기 돈은 한 푼도 안 쓰면서 나아가 ‘정치인 기부행위, 받는 것도 요구하는 것도 할 수 없다’고 못 박아 놓고 가난한 자를 위해 정치하겠다는 입나팔을 불고 있다.


아무리 정치판이 난장판이라지만 오늘날처럼 실망스러운 시절은 없었다. 특히 지금의 여권은 너무 뻔뻔하다. 당초 기득권의 독주로 인해 세상이 불공정해졌다며 정권교체로 균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그러나 여는 공정하지 않고, 야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야는 코로나 시절에 밀집 집회를 주도하면서 민심이반의 불섶에 기름을 부었다. 여야 모두 오로지 자기네 입신양명만 생각할 뿐, 백성에 대해서는 위정자들이 갈라 둔 프레임에 갇혀 평생 댓글이나 달고, 대신 싸워주고, 표나 몰아주는 무지렁이로 취급하고 있다. 


이건 명백한 사기다. 그럼에도 현행법상 사기죄로, ‘선거사기죄’로도 이들을 단죄할 수는 없다. 돌아올 4년을 기다린다한들 뾰족한 대안도 없다. 법은 그들이 만들었고, 그 법 위에 그들이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여론을 선도해야할 언론마저 정당의 대변지 노릇을 하고 있는 지금이다. 나라와 겨레의 장래를 염려하는 선각자가 기다려지는 시절이다.

 

2020년 10월 20일

조관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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