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닐 때 일이니 벌써 오래 된 이야기다. 공부하기 싫어 캠퍼스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대형 강의실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궁금해서 가 보니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가 신입 컨설턴트를 채용하기 위한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었다. 지금에야 컨설팅 회사가 무엇을 하는지 대부분 알지만 그 때만 해도 컨설팅은 생소한 분야였다. 대충 발표가 끝나고 로비에서 간단한 스탠딩 파티 같은 것이 열렸는데, 나는 키도 크고 좋은 양복을 빼 입은 외국인 파트너에게 다가가 도대체 컨설팅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 파트너는 간단히 말해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solving the problem)’이라고 대답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막상 변호사가 되어 일을 해 보니, 변호사라는 직업이야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그리고 그런 불완전한 존재들이 모여 사회를 만들었으니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함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분쟁이란 나의 생각과 상대방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아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은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특히 돈이 걸려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결국 분쟁의 해결이란 당사자 일방의 생각을 바꾸거나 아니면 그 사람이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어떤 결정을 강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컨설팅이 될도 수 있고 재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이다. 왜냐하면 법이란 구체적 사안에서 그 내용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규정이 적용되도록 하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에는 두 종류가 있다. 강행규정과 임의규정. 이를 간단히 설명하면, 강행규정이란 당사자가 그와 다른 합의를 하더라도 그 규정이 우선한다는 것이고, 임의규정이란 반대로 법 규정이 있지만 그보다 당사자간 합의가 우선하고 그러한 합의가 불명확할 경우 이를 보충하기 위해 사용되는 규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민사와 관련된 대부분의 규정들은 강행규정이 아닌 임의규정이니 법보다 계약서가 더 중요하다는 말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아무리 민법이나 상법 그 밖에 특별법 규정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법 규정이 계약서보다 우선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계약을 할 때는 그때 그때 계약서를 작성하기보다 미리 만들어 둔 계약서를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대표적인 것이 약관인데, 약관이란 그 명칭이나 형태 또는 범위에 상관없이 계약의 한쪽 당사자가 여러 명의 상대방과 계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일정한 형식으로 미리 마련한 계약의 내용을 말한다(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호).

 

그러나 회사와 회사가 계약을 체결할 경우 더 중요한 것은 표준계약서이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는 각종 거래유형에 따라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제공하고 있는데, 건설공사와 관련해서는 ‘건설업종 표준하도급계약서’ 등이 있다. 그런데 건설회사들과 일하다 보면 발주자와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공사계약 일반조건’ 등은 건설회사들이 그 내용을 대부분 숙지하고 있는 반면, 위와 같은 표준계약서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예컨대, 민법상 당사자는 언제든지 채권을 양도할 수 있으나, 채권양도금지 특약을 둘 수도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대법원은 “당사자의 의사표시에 의한 채권양도금지는 제3자가 악의의 경우는 물론 제3자가 채권양도금지를 알지 못하는 데에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 그 채권양도금지로써 대항할 수 있다”고 판시하고 있다(대법원 1999. 12. 28. 선고 99다8834 판결 등).

 

그런데 건설업 표준하도급계약서는 “원사업자와 수급사업자는 이 계약으로부터 발생하는 권리 또는 의무를 제3자에게 양도하거나 승계시킬 수 없다. 다만, 상대방의 서면에 의한 승낙(보증인이 있으면 그의 승낙도 필요하다)을 받았을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는 규정을 두고 있고, 법원은 개인이 아닌 회사는 이러한 규정이 존재함을 당연히 알 수 있는 것으로, 따라서 채권양도금지를 알지 못하는 데에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권리는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다. 표준계약서 내용을 공부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회사 경영자나 담당자는 그 내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2020년 6월 12일
법무법인 정진 정혁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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