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봐도 강도 행각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사회병리 현상을 고발하고 있다. 여기에다 병실에 있는 아내를 상징하는 그림 컷과, 강도짓에 실패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쓸쓸히 걸어가는 그림 컷을 추가했다. 모 방송에서도 이 사건을 ‘사회의 아픈 한 단면’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내용은 쉰 두 살의 영세사업자가 최선을 다해 살아왔으나, 세월호 사고 여파로 학교공사가 줄줄이 취소됐고, 설상가상 아내는 척수암 판정을 받는다. 형도 백혈병에 시달리고 80대 노모는 만성 당뇨에 시달리고 있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집을 나왔고, 경기도 문산 지인의 컨테이너 쪽방에서 생활하다 결국 돈 많은 사람이 산다는 서울의 강남으로 잠입해 강도 행각을 벌였다는 것이다. 기사 말미에 생계형 범죄라고 진단하고 “벼랑 끝에 선 가장들이 범죄 현장에 내몰리는 건 이제 흔한 풍경이 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나아가 사연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언론사로 성금이 답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언론 고유의 보도태도를 타 언론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금기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작금의 사회병리 현상을 치유하는 게 아니라, 더 큰 사회문제로 번질 수 있는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어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우려되는 대목은 사업실패의 인과관계를 세월호 침몰사고라는 사회현상에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 사업자는 오로지 자신 만이 독립변수이며, 사회현상은 종속변수에 불과한 것이다. 불리한 사회현상이 강도로 내몰 수밖에 없었다고 옹호한다면 또 다른 강도짓이 생계형 모방범죄로 번져나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두 번째로는 범행을 결심하고 강남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어디서든 빵을 훔쳐 먹었다면 생계형 범죄로 볼 수 있으나, 범행을 결심하고 부자들이 많다는 강남으로 향했다는 것은 부자의 돈은 뺏어도 된다는, 말하자면 부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왜곡돼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철저한 자기관리와 절약이라는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다. 세금탈루나 돈벼락을 맞아 부자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욱이 아무리 백만장자라도 ‘흥청망청 3년’이면 거덜 나는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물론 미수에 그친 점, 상해를 가하지 않은 점, 곧바로 뉘우쳤다는 점은 작량감경의 사유가 될 수 있다. 감형을 받을 여지는 충분하나, 마치 사회병리가 개인을 강도로 내몰았다는 것은 지나친 옹호이자 치우친 시각이다. 우리의 90%는 사업실패, 구조조정과 해고, 미취업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들은 그러나 엄중한 사회규범의 틀 안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다. 

 

지금의 원로기자들은 수습시절, 한국일보 출신 이행원 님의 ‘취재와 보도의 실제’라는 책을 거의 필독서로 삼았다. 고액과외가 금지되던 그 시절, 집안 사정이 딱한 한 여대생이 과외를 하다 적발돼 유치장에 갇히는 비슷한 사례가 나오는데, 당시 법이 보호하고자 했던 사회적 법익(法益)은 대체로 부유층 자녀와 당락의 칼자루를 쥔 대학교수와의 유착을 단절하자는 것이었다. 본래의 법 취지와 달리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던 선의의 학생도 적발되면 모두 전과자가 됐으니, 데스크가 시각을 바꿔 이 학생을 구제했다. 그 보도로 무분별한 일망타진에서 생계형이었는지를 따지는 전환점이 마련됐다.  
 

두 사건 모두 생계를 위해 법을 어겼다는 것은 공통적이나, 국가가 지키고자 하는 법익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아무리 딱한 가장이라도 강도 행각은 분명 심각한 ‘사회 침략 행위’다. 이를 구분해낼 줄 아는 신중한 보도태도가 아쉽다.

 

2015년 7월 22일
조관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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