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비리부터 발본색원하겠다는 고도의 통치행위 맞죠?”
경남기업 성완종 사장이 억울하다는 유서와 함께 유명을 달리한 최근의 사태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정치권 핵심을 향해 던지는 넋두리다. 고도의 통치행위임을 수긍하면서도 자수성가한 사람을 사지로까지 내몬 건 너무 과하지 않았느냐는 게 또한 일반적인 시각이다. 더욱이 내가 깨끗하다고 내 수하까지 깨끗하다는 보장이 없는 정치일선에서, 복마전 같은 정치현실의 생리를 모를 리 없는 분이 이처럼 세차게 몰아붙였을 때는 분명 고도의 계산된 뒷그림이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 범부의 생각이다.


이들은 또 묻는다. “압수수색 당해 보셨습니까”라고…. 그들의 하소연은 이렇다. “불법행위까지 보호하자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압수수색이라 함은 바지와 치마를 걷어 올리고 특정 부위에 점 하나 있는 것까지 살피는 것이 압수수색입니다. 집안의 세간살이가 쑥대밭이 됨은 물론이요, 메모로 간직해 두었던 속마음도 까발려지는 수치스런 모독입니다. 따라서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하는 것입니다. 역대 정권에 이처럼 많은 압수수색이 지금처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진행된 적 있었습니까”라는 반문이다.


어떤 하루 나는 업무차 룸살롱을 다녀왔고, 그날 아내에게만큼은 숨기고 싶은 작은 일탈도 있었다. 그러나 그뿐,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영위해오고 있다. 또 어느 여인은 어린시절 한때 그리워하던 사람의 이름을 책갈피에 적어보았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다만, 아들 딸에게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고 또한 그럴만큼 비중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압수수색을 당하면 이 모든 내면의 세계가 공개된다. 배우자와 자녀에게는 공개하고 싶지 않았던 사소한 일상들까지도 가십거리처럼 공개돼 하릴없는 모욕을 당하게 된다.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여기에 자유스러울 사람 누가 있는가? 여성의 미끈한 다리를 보고도 슬쩍 동공이 변하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며, 가끔 다른 이유로 가슴 설레어보지 않은 여성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압수수색을 당하면 책갈피 속, 컴퓨터 속의 이런 소소한 양심들이 낱낱이 공개되기에 이게 진정 두려운 것이다. 차라리 “내가 다 뒤집어 쓸테니 모든 것 덮어두시고, 원하시는 혐의대로 처리하십시오”라고 굴복하는 게 오히려 낫다는 게 압수수색을 당해본 사람의 심경이다.


때문에 체포 구속 압수와 수색에 대해서는 엄격한 적법 절차를 밟도록 헌법은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뉴스에서는 압수수색이라는 단어가 동네 개 이름처럼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미 사자가 된 성완종씨의 경남기업을 비롯, 포스코건설 중흥건설 석유공사 가스공사 광물자원공사 한전KDN 등등…. 경기는 얼어붙고 있는데도 기업에 대한 압수수색이라는 단어는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공기업의 경우도 혐의를 받고 있는 해당 간부의 자택은 압수수색이 뒤따랐다. 사적영역까지 깡그리 허물어졌다는 말이다.


결국 고인이 된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의 진실게임이 진행되는 형국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진실게임이 얼마나 공정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민초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 돼 버렸다. 밟아야만 비로소 꿈틀거릴 뿐, 영혼 없는 무지렁이에 불과하지만 다만 지켜는 보고 있다. 고도의 계산된 타깃이 ‘측근비리 척결’이었다면 성역 없는 수사로 고인의 넋이나마 달래줘야 할 것이다.

 

2015년 4월 16일
조관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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